폴 카도비우스, 디터 람스, 그리고 오르막하우스 패치 월 시스템 이야기 공간은 계속 달라져요.
작업 공간으로 쓰던 방이 수납 공간이 되고, 비워뒀던 벽에 뭔가 걸고 싶어지고, 작년엔 필요 없던 선반이 올해는 꼭 필요해지기도 해요. 가구는 옮기면 되는데, 벽은 그게 잘 안 돼요. 한 번 만들어지면 그 상태로 유지된다는 전제가 처음부터 깔려 있으니까요.
그런데 가구가 그 전제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번 호는 고정되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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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디자이너 디터 람스(1932–)는 한 문장으로 자신의 철학을 요약했어요.
"Less, but better." 덜어내되, 더 나아야 한다.
그는 불필요한 요소를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진정한 디자인이라고 믿었어요. 단순히 미니멀한 외형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물건이 사용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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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가 직접 가구 시스템을 디자인했다는 거예요. 시스템 책장에 책을 가득 꽂으면 책장 자체는 거의 시야에서 사라진다고 했어요. 가구가 눈에 띄지 않을 때 비로소 공간이 살아난다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그가 원했던 공간은 이런 거였어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꼭 맞게 바꿀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움직임이 있고 변화를 허용하는 여유가 있는 공간.
가구가 공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사람에 맞춰 달라질 수 있도록. 그게 그가 가구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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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선반의 역사는 전쟁이 끝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요.
1940~60년대 유럽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어요. 무너진 도시를 빠르게 재건하는 것, 그리고 급격히 늘어난 도시 인구를 수용하는 것. 그 과정에서 가구도 달라져야 했어요. 장인이 만든 비싼 가구가 아니라, 누구나 살 수 있고 어떤 공간에도 맞는 가구. 그 질문에서 모듈 선반이 태어났어요.
1948년, 덴마크 디자이너 폴 카도비우스는 로열 시스템을 선보였어요. 출발점은 단순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닥 위에서만 산다. 벽을 바닥처럼 활용하면 훨씬 많은 공간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아르데코 양식의 책장은 무게가 100kg에 달하기도 했어요. 로열 시스템 선반 하나는 1kg이었어요. 가구가 바닥을 점령하던 시대에 카도비우스는 방향을 90도 틀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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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디터 람스의 606 유니버설 쉘빙이 나왔어요. 브라운 쇼룸을 재구성하다가 시작된 아이디어였어요. 알루미늄 트랙 하나를 벽에 고정하고, 선반과 캐비닛을 핀으로 걸어두는 방식. 도구가 필요 없고, 높이는 언제든 조절할 수 있어요. 1960년 출시 이후 기본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지금도 팔리고 있어요.
같은 시기 스위스에서는 건축가 프리츠 할러가 USM 할러를 만들었어요. 자신이 설계한 공장 사옥에 어울리는 가구를 찾을 수 없어서 직접 만든 거예요. 기업 내부를 위해 만든 가구가 사무실로, 다시 가정으로 퍼져나갔어요.
세 시스템은 나라도, 소재도, 시작점도 달랐어요. 그런데 공유한 전제는 하나였어요.
완성된 가구를 파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완성하는 가구를 만든다.
이 가구들이 60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는 디자인이 예뻐서가 아니에요. 구조 자체가 시간을 타지 않기 때문이에요. 공간이 바뀌면 구성을 바꿀 수 있고, 삶이 바뀌면 선반을 추가하거나 줄일 수 있고, 수십 년 전 부품과 지금 부품이 연결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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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공간에서 가장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가구는 옮기면 되고, 조명은 바꾸면 되고, 커튼은 교체하면 돼요. 그런데 벽은 한 번 만들어지면 그 상태로 유지된다는 전제가 처음부터 깔려 있어요. 그래서 공간이 달라져도 벽만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실제로 살다 보면 벽에 요구하는 것들이 계속 달라져요. 작업 공간으로 쓰던 방이 수납 공간이 되고, 비워뒀던 벽에 선반이 필요해지고, 작년엔 충분했던 구성이 올해는 부족해지기도 해요. 물건을 치우고, 배치를 다시 정리하는 일이 반복되는데, 벽은 그걸 따라가지 못해요.
패치 월 시스템은 그 전제에서 시작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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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찍찍이, 즉 벨크로에서 왔어요. 떼고 붙이며 필요에 따라 바뀌는 구조. 월 베이스를 중심으로 선반, 서랍, 수납 모듈이 결합되고, 필요한 만큼 붙이고 필요 없어지면 떼어내요. 공간의 용도가 바뀔 때 벽도 함께 바뀌는 거예요.
완성된 형태를 제안하지 않아요.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구성하고, 삶이 달라질 때마다 다시 조합해요. 오르막하우스는 그 반복이 가능한 구조까지만 만들고자 해요.
월 베이스 하나가 붙는 순간, 벽은 배경이 아닌 구조가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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